동물 신학의 탐구,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Andrew Linzey, 장윤재 옮김, 대장간, 2014 | Creatures of the Same God: Explorations in Animal Theology, 2009
섹션1. 한국독자들에게
“인권을 탄압하는 국가들에서는 동물권 역시 심각하게 부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나라, 더 좁게는 나의 세계에서 동물권은 얼마만큼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까? 2019년이 가기 전에, 중국과 베트남, 한반도에서 일어난 돼지 구제역 학살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는가? 아무 영문도 모른채 산매장을 당해야 했던 그 생명들의 고통은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학살자인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세포에 속속들이 들어와 있는가? 참으로 어렵고 다가가기 힘든 주제들이 여기에 내포되어 있다.
“동물들은 단지 육체적 자극에 의한 고통만이 아니라, 정신적 충격, 공포, 쇼크, 불길한 예감, 비통과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이 전문가의 과학적 증거로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
“내(저자) 희망은 오랫동안 평화와 정의를 갈망해온 한국인들이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체에게로 이 정의와 연민을 확장하자는 것이다.”
확장의 문제, 이것이 영성의 푯대이다. 내 자신에서 가족, 공동체, 더 나아가 창조세계까지 사랑과 정의를 확장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에 조금이나마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든다는 것, 제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의 표징은 이와 같다. 마지막에 창조세계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우칠 때, 비로소 미련이나 고통없이 하나님 품에 안길 것이다.
역자서문-신적 권리로서의 동물권
“한국은 OECD 국가 중 유기견 수출 1위이다.”
여기 소개된 티파니 이야기는 우리의 양심을 아프게 찌른다. 티파니는 누군가 식용하려고 철사로 입을 묶은 채 뭉둥이질을 했다.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입이 몽땅 잘려나가야 했다. 캐나다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고, 캐나다 전역에서 입양 신청이 쇄도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자명하게 느낀다. 이 느낌이 이 책을 하늘뜻 공동체가 함께 읽는 동기가 되길 바란다. 아직 우리의 사랑은 자기애적이고 이기적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상품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동물을 이용한 독성 실험을 거친 것들이다.”
쥐를 33일간 잠재우지 않기(시카고대학), 갓 태어난 생쥐의 앞다리를 잘르되, 그럼에도 자기몸을 단장하는지 관찰하기(오레곤대학), 10일 된 새끼고양이 양 눈을 꿰매 시력상실의 영향에 해 관찰하기(옥스퍼드대학).
더 언급하기도 무섭다. 피터 싱어,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라고 했다. 나는 지금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제국주의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면,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 안의 하나님은 이런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한 우린 나치이고, 일본제국주의자임을 먼저 직시하고 고백하고 회개한다. 여기에 새로운 출발선이 있다. 하늘뜻 공동체는 이 출발선에 어색하지만, 같이 서기를 기대한다.
각설하고, 저자인 린지의 동물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신적 권리theos-rights이다.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고유한 권리이다. 그러므로 동물권의 침해는 곧 하나님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다.
조상들이 동물을 대했던 태도에 대한 역자의 이야기는 큰 위로가 된다.
‘까치밥’, ‘고시래’, 콩 3알을 심어, 한 알은 새, 다른 한 알은 땅 속의 벌레가 먹게하는 농부의 배려, ‘쇠짚신’, 작은 생물이 다칠까봐 뜨거운 물도 식혀 버렸던 어머니의 살림솜씨, 이밖에도 무수한 조상들의 동물권에 대한 지혜가 넘쳐난다.
결국 우리는 린지의 책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혈관과 전통 속에 흐르는 ‘까치밥’을 찾으면 된다. 원래 갖고 있었으나, 여러 이유로 잃어버린 흙내음을 맡으면 된다. 그 여행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