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tated by Rev. Henry Kim
“이것은 살아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받아적은 비밀의 말씀입니다.”
도마복음 서문에서 언급된 전문의 내용입니다. 디두모, 유다, 도마 라는 세 개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비밀의 말씀들로 표현합니다.
이미 아는 것처럼 도마복음서는 기독교전통에서 소외되었다가 20세기 중반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위의 이름 디두모는 희랍어로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도마는 아람어/시리아어로서 역시 쌍둥이 라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읽으면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고유명사로 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죠. 그래도 전통 기독교의 요한복음서 등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이름으로 도마를 지칭해서 유다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쌍둥이로 알려진 도마 그대로 불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는 유다라는 이름이 또 있지요. 가룟사람 유다, 예수님을 팔아 넘긴 제자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쌍둥이 유다를 도마로 표현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알려져 온 이름 도마와 혼동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도마복음서는 전통적으로 전승되어 기록된 4권의 복음서와는 다릅니다. 현재의 기독교 경전으로 포함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에서 표현되는 장면들은 도마복음의 간략한 예수님의 말씀들과 비교됩니다. 도마복음의 예수의 말씀들은 사유하지 않고, 깊은 명상과 성찰을 통하지 않고는 알수 없는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오늘 읽어가는 서문의 내용이 바로 그렇습니다. 비밀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비밀 결사대의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소종파 끼리의 모임을 주도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미 바울의 기독교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신비, 그 십자가의 지혜(고린도 전서 1장과 2장)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비밀이고 신비입니다. 희랍어 ‘미스테이온’입니다. 여기서 희랍어 미스티코스의 의미가 파생되는데 mystery(신비)는 사실 감각을 차단하고 체험하는 그 경지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쌍둥이 유다가 적어 내려간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은 신비체험의 경지일 것 같습니다. 피상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상성, 습관성, 추상적 몰이해(무지)’를 꿰뚫고 온 존재를 뒤흔드는 체험! 뒤바꾸어 버리는 힘의 근저에서 나오는 그 신비의 경험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합니다.단순한 ‘암호 담지자- 결사의 비밀’을 언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비밀’이라는 단어에 속임을 당해 왔습니까? 그 울타리 안에서 자행되는 온갖 비행과 거짓과 사행들, 앎을 소유하는 자들의 악한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오늘은 비밀을 비밀로 표현한 원래의 뜻을 회복해서 다시 읽습니다. 앎(knowledge),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는(존재하는) 것도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형성된 생명입니다. 아는 만큼 존재한다는 뜻이 그것이겠지요. 그 앎을 통해 존재가 형성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안셀름은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습니다.
아침편지가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매우 명료한 사실입니다.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해 왔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믿음마저도 인식의 한 가운데 있는, 즉 앎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즉 사유하는 과정이 없으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쌍둥이 유다의 복음서는 처음부터 비밀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앎은 비밀과 자연스러이 연결됩니다. 앎이 지니는 깨침의 경지, 그것은 폭로되기 전에는 비밀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 존재이신 하나님이 계시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비밀입니다. 그것은 신비입니다. 알려지는 지식, 폭로되는 지식, 어떤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내 버린 존재입니다.
그러나 쌍둥이 유다에게 적어 내려가게 한 살아있는 예수님의 비밀의 말씀! 오늘의 21세기의 아침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기대가 됩니다.깨침을 촉구하는 신비가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앞에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습관성을 뚫고, 일상의 감각을 차단하고 들어가는 그 비밀을 오늘 아침에 한 번 설렘을 가지고 대해 봅니다. 그래서 20세기 전 바울은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감추었던 것”(고전 2장 7절)이라고 선언했었나 봅니다.
쌍둥이, 참 의미하는 바가 있는 단어입니다. 영과 육의 닮은 꼴? 원형의 존재 하늘과 그림자 땅의 닮은 꼴? 갑작스런 쌍둥이가 아침부터 그려집니다. 예수와 쌍둥이라고 인식되는 그런 메타포는 아닐까? 이 복음서의 기자는 그런 암시를 하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쌍둥이는 바로 이 글을 읽어서 깨침을 받아 신비에 도달하는 그 순간 살아계신 예수로 변화되는 것, 그것은 아닐까?
아침에 존재의 근원이신 하늘과 함께 하는 것, 그 내면은 우리의 거울처럼 비추는 쌍둥이의 온전한 모습이리라 고백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