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 뉴스의 연재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을 정독하며 글을 추가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살아가는 자리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 귀퉁이라면, 우리에게 이 폭우를 넘어설 이정표가 필요합니다. 동학이 걸어간 그 혁명의 길에서 신앙을 묻습니다.
(사진출처:오마이뉴스)
‘반봉건’과 ‘척왜척양’의 기치는 그 시대 상황에서 의열장부라면 마땅히 들어야 할 시대적 가치였다. 그것을 ‘잘난’ 양반들이 모두 몸을 사릴 때 그들이 일어섰다. 반봉건이 이들의 첫 주장이라면 척왜척양은 그들이 남긴 마지막 뜻이었다.
우리 시대가 던지는 가치는 무엇인가? 수 많은 생명을 먹고 오늘의 시간을 덤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밥값을 해야 하고, 밥값을 하려면 시대의 요구를 알아 차려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거대한 부유층이 생기고, 동시에 바다의 모래같은 ‘가난’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여기에 공동체의 존재이유와 생존의 뿌리가 숨겨져 있다. 숨겨져 있다는 것은 신비이고, 신비는 눈의 각질을 벗은 자만이 볼 수 있다.
동학혁명은 조선 봉건제 해체사의 최종적 도달점이며 근대조선 민족해방 운동사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다.
1세기가 시작되는 지점에 예수께서 계셨다. 그의 운명이었고, 그분은 그 운명을 기도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연대로 수용하셨다. 갈릴리의 그 거리, 굶주림과 인종차별, 종교과 권력의 이중적 핍박의 한 가운데 자신을 세우셨다. 우리시대는 자본주의가 금융의 허구에 기대어 팽창이 극에 달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이 최고조에 다달았다. 무한성장이라는 허구에 기대어, 유한한 지구의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 언젠가 이 미친 기차는 멈출 것이다. 그 이후를 신앙인이라면 상상해야 한다.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사상은 유교의 인륜, 불교의 각성, 선교의 무위가 접화군생(接化群生)하는 천도사상을 말한다. 천도사상의 중심 개념은 인내천, 즉 천인합일 사상으로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고(事人如天), 억조창생이 동귀일체(同歸一体)라 하여 계급제도를 부정하며, 인간평등을 주창하는 인존사상을 종합한다.
더 줄이자면, 사인여천! 사람을 하늘님처럼 받들고 모시라는 뜻일 것이다. 양반과 상놈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은 했어도, 당시 모든 이의 의식은 철저한 계급의 노예였다. 최제우는 어떻게 그 경계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아예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농민들 속에 하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았을까? 우리 신앙인은 가장 가난한 이웃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어디까지 보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하고 더러운 옷을 입을 사람을 보면, 겉으로야 친절한 척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양심은 우리를 고발한다. 늙음 속에서 추함을 먼저 찾아내고, 약함 속에서 착취의 본능을 먼저 드러내는 우리가 아닌가 돌아본다. 시대의 억압을 부수는 최제우의 깨우침, 성서적으로 예언자적 상상력, 그 ‘각성’ 곧 세례의 다리를 반드시 건너야 한다. 내 안의 하나님의 현존을 먼저 깨우치고, 그 바탕으로 타자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동학혁명은 부패한 봉건세력이 끌어들인 일본군에 의해 끝내 좌절되었으나 반식민지, 반봉건의 민족ㆍ민중운동의 원천이 되어 이후의 민족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고 3ㆍ1혁명, 의병운동,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등의 정신적인 원류가 되었다.
만약 동학혁명이 성공했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한다.